기도의 양을 채우라(행 4:29~31)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 시대의 비극 중의 비극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지식은 다시 쌓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물건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기도 시간만큼은 영원히 찾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채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이키거나 되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음식의 분량이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기도의 분량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 아무나 가지 않습니다. 지식의 양, 공부의 양이 있습니다. 단어를 더 많이 암기하고, 많은 문제를 풀어야 만이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신자 때의 기도 분량이 다르고 직분자 때의 기도 분량이 다릅니다. 또한 동일한 직분자라도 사명에 따라 분량이 다르며 평신도와 집사 장로 직분 저도사와 목사 등 직분에 따라 기도 분량이 다릅니다.
더 나아가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채우는 역사입니다(때를 채우고 기한을 채우고, 의를 채우는,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를 채우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을 채우는 역사<롬 8:3>입니다. 그러므로
1.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한다 (초대 교회의 상황 - 교회의 상황)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후에 예루살렘 온 성의 관원들이 동원되어 사도들을 핍박, 그 위험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29절에‘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험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
(행4: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1)빌기를 다했습니다.
위기를 만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 표현을 ‘빌기들 다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열심히 기도를 했다’의 의미보다, 기도의 양을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고난과 어려움들, 인생의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장애물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금식과 작정. 혹은 철야와 기도로 몸부림 처 기도하여 결국은 자기의 기도 분량을 다 채우게 한 후에야 주님께서 비로써 그 문제를 순조롭게 잘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각자 자기의 기도 분량을 알고 그 분량을 매일 채울 때 주안에서 행복한 성도요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계 5:8, 계 8:3~5) 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성도의 기도를 향이 가득한 과 함께 금대접에 열심히 담습니다. 기도가 금대접에 가득차면 하나님의 보좌로 올려가 하늘의 아버지께 드려지고 하나님께서그 금대접을 땅에 쏟으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계 5:8)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8:3~5)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은 하나님의 응답의 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수에 있어서 많은 성도의 기도, 양에 있어서 많은 양, 큰 기도, 많은 기도, 개인, 가정, 교회, 나라가 합친 기도. 다량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겠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운명을 다스리는 열쇠가 되겠는가? 그것은 성도의 기도,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이 세상의 어떤 세력보다 강하며 이것이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중요한 목적이 됩니다.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사 64:11~12, 65:17~25)
모든 장애물에는 기도의 양이 정해져 있다. 이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 삶속에 아직도 미해결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장애물을 이기기 위한 기도의 양이 한번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애물이 무너질 때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애물은 능력을 주기 위한 섭리입니다.
2)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다이나마이트가 터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음전파의 장애물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현상(천재지변..)인지는 모르지만 그 장애물이 터진 것입니다. 그 결과
3)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서 성령의 권능(뒤나민)은 사도들의 장애물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복음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장애물을 극복하면 극복할수록 성령의 권능이 전도자에게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그 어려움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행5:41~42)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장애물뿐 만 아니라 내 삶에 모든 부분에서 영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기도입니다.
2.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마 26: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곳이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피곤에 지쳐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제자들을 보고 주님 안스러웠지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담긴 중심적 의미는, 깨어 있는자 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입으로 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깨어 있어야 올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헬라어는 '그래고레오' 인데, '깨어 있다' '지켜보다' '주시하다' '망보다' '방심하지 않다' 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샤카드'는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깨어 있음(시 127:1)을 뜻합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적군의 침입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하여 전방을 주시하는 것, 그것이 깨어 있음의 기본적인 의미다. 그런 점에서 '깨어 있음'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긴박한 사태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자세를 뜻한다. 곧 '깨어 있음'은 앞으로 닥칠 위기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는 깨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던 도중 예수께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니라"(마 26:31)고 말씀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3, 35)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신앙의 고백이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자만이며 자랑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지 못한 수제자 베드로, 기도의 뒷받침이 빠진 베드로의 확신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69절에 한 비자(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절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고 앞문 까지 나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비자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도다”하니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합니다(71~72).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서 베드로에게 또 말합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당신의 말씨만 들어오 알 수 있다)”. 베드로 뭐라고 합니까? 그 호언장담한 베드로가..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
왜 웁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함께 기도하자고 주님께서 얼마나 간곡히 말씀하셨습니까?? 그 때 제자들 다 잠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결과 그렇게 사랑하는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보다 우월합니까? 베드로보다 더 많은 체험이 있습니까? 더 나은 믿음인가요?
시험에 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이 환경 때문이며, 그것이 사람 때문이며 그것이 남의 탓입니까? 언제까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시험에 넘어지고, 뒤로 물러나 있고....
하나님의 교회가 힘든데 개인 적인 삶이 잘 되겠습니까? 학개 선지자 시대 때 성전 건축이 황무했을 때,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몰두 했습니다. 자기의 집은 판벽한 집에 거하면서 성전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찌어다” 많이 뿌릴 지라도 수입이 적은 이유가 무엇인가?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한고 입어도 따뜻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삯을 받아도 구멍뚫린 전대 넣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집이 황폐했기 때문입니다.(학 1: 3~11)
결론 : 성경은 시험드는 이유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응답받지 못한 이유는 기도의 양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도의 양이 채워질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하는 바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눅 11:5~13)또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잇는데 밤 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