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임하는 지혜로운 자세 (전 11:1~8)
(전 11:1~8)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삶’이란 ‘살다’에서 온 말로서, 삶은 사는 것이요, 살리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것, 죽어가게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 거짓과 미움과 근심과 불안, 나태와 무위, 허무감 따위가 섞여 있거나,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가고 있거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기를 원합니다. 살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는 사람도, 잘못 살아가는데서 생긴 갈등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진 까닭으로 자기 본연의 욕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보면 우리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 지 곧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절대의 욕구를 가지고 이토록 살고 싶어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돌아보면 스스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참으로 드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고 살리는 일보다 죽고 죽이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어제와 오늘이 아니었는지 돌아보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1~2)
“너는 네 식물을 물 위로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나눠 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모험에 가까운 사업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것은 그 던지는 것이 결코 허망한 어떤 물건이 아니라 다시 소생이 가능한 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그것은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을 지닌 그 어떤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필연코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 32:20)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가 청지기 시무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최종 결산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지기가 자기 직분을 빼앗기고 난 다음을 생각하고 지혜를 짜내어 그가 청지기로 있는 동안에 재빨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많은 양을 후하게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인의 칭찬을 받게 된다는 비유입니다(눅 16:1~8).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낭비한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여 미리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칭찬 한 것입니다(잠 11:18, 호 10:12).
우리 모든 성도의 삶이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물들을 많이 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내용들이 의와 공평과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것들로 구성되기를 바랍니다.
2.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3~5)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틀림없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전도자를 보십시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대수롭지 않은 날씨 변화 때문에 씨앗의 파종을 미루는 자는 그 일을 올바로 끝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이러한 마음 자세를 지닌다면 이는 곤란 한 일입니다. <앞날의 불확실성과 예상되는 장애물> 때문에 해야 할 일을 과감하게 하지 못하고 나약해져 있다면, 다음에 어떤 더 큰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특히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상되는 박해와 어려움 때문에 우리 자신이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을 정당시한다든지, 신앙상 제반 활동들을 정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매이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너무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여기 전도서 기자가 언급한 내용처럼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를 뿐 아니라, 그 밖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를 인정하고, 오직 모든 일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을 되게 하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시 57:2)
3. <주어진 생활의 영역>을 즐거워하며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6~8).
실로 우리의 생은 여기 이 말씀 그대로 입니다.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은 둘이 잘 될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항상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살다 보면 캄캄한 말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영역은 우리가 가진 신앙을 용납하고 이해할 만큼 그리 너그러운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격려하기 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공격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 시대는 자기 기준대로 공연히 이렇다 저렇다 평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러기에 사람이 만일 이런 말 저런 말 다 들으면서 주어진 자리에 주저않아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면, 그는 평생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참된 자기를 잃어버린 채 그저 사건에만 끌려다니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삶을 결코 그런 식으로 소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대를 이끌어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책임지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생을 남의 말 때문에 고심하며 낭비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보상만을 기억하고 즐거움으로 사역에 임합니다.
4. <믿음과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라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장 요긴하게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언제나 중요하고 요긴한 것은 믿음과 성령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은 꼭 받아야만 합니다. 믿음과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면 살아도 헛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막 9:23, 요 20:27) <예수님 세상 떠나실 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 요 20:22, 행 1:8>이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요 믿음을 가지는 길이 성령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말씀대로 믿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사실 믿음같이 막연한 것은 없습니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주소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할 때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말씀대로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말씀하신 그 분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에 믿음의 대상이 될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믿을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의 인격과 품격은 완전무결하고 진실 무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행사는 그대로 믿어 조금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2)바랄 수 없는 것을 믿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세상은 무슨 일이든 사실과 실증을 확인하고서야 사실을 사실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실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사람을 믿는 것이고,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것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믿는 자는 믿는 대로 되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100세 된 노인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낳는다고 할 때에 낳을 줄 믿었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했을 때,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 실 것을 믿었고,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극단에 서서 극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조금 나아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이 바뀌고 전면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3)알고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 될 줄 알면서 될 줄로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살, 사라는 90살이니 둘 다 산 송장입니다. 사라는 경도가 끊어진지 오래고, 그의 태는 죽은 것입니다.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믿음을 견고하게 가졌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눈 딱 감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바라기가 쉽습니다. 눈 앞에 일이 안되고 있는데 될 줄로 아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일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고 믿는 믿음이 믿음의 가부를 결정지어 주고, 알고 믿는 믿음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믿음을 견고케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현세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영원한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의 선각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그는 비록 그 주어진 시대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장래에 부딪쳐 올 사건을 미리 내다보기 때문에 그 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결코 주어진 순간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바는 모든 시대가 <올바른 삶의 자세로 장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손에> 맡기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눈 앞에 사실만 바라본 사람은 <역사의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장래사를 가르쳐 주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창조 이래의 모든 과거를 교훈삼아 갈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생활의 영역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시고 말씀대로 믿는 믿음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