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5:11)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구속역사를 이루기 위해 모세를 훈련 시켜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이후, 마지막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싯딤에 진을 치게 됩니다(41번째 진 친 장소). 이 곳은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으로(민 33:48- 49)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의 모압 여인들과 행음으로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본문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천국을 눈앞에 두고 세상 가운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부속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특히 여호와의 눈을 더욱 거스르게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여인들이 자기들의 우상에게 제사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여인들이 섬기는 그 우상에게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므로 그 몸을 우상에게 받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고전 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민25:4)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으라고 했는데, 모세는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인즉 의미하는 바는 바로 백성의 두령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모압 여인과 행음 했으며, 교묘하게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속되었다(가담한지라)’(차마드 : 스스로 결합하다, 스스로 얽어메인 것이다)는 것은 바알브올의 종이 되어 그의 다스림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바알브올이란‘브올의 바알’,즉 ‘브올이란 곳에서 섬기는 바알’이란 뜻입니다(민 23:38, 신 3:29, 4:46). 이‘차마드’라는 동사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반역이 얼마나 극악하고 완악했는가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의 신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자들인가요?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이 다스림만을 받고 그외에는 누구에게든지 부속되어서는 안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무 것도 아닌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에게 부속되어 그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돈, 지식, 명예, 욕심...).
교회의 역사 속에 언제나 있었던 사건은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항상 그 연륜에 비례하여 성숙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상황에 따라 이해 관계에 따라 야합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모든 판단들이 신앙생활의 시간에 비례하여 항상 명철하고, 지혜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비늘이 끼게 되면 공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진리, 참됨이)가 무엇인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결을 잃어가던 시대 속에서는 항상 그 교회의 주도권이 자기 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회의 부패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현장마다 문제는 세상에 부속되어 있는 자들로 인해서 교회는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지 않으면 영적분별을 할 수 없으며, 시대상황을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을 할 수 있겠는가? (고전 2:13~14)
2.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5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명하여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서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명령은 인간적으로 볼 때 차마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사들이 모세의 명을 받들어 죽어야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들의 가족이며 친족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백성이 회막문 앞에서 울고 있는 이 와중에서도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이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인해 백성의 두령들을 목메어 죽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 진노를 빨리 그치게 하기 위해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잇는데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그저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죄악의 정도가 얼마나 지나쳤으며 성경은 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민 26:14 – 시므리<시므온 종족 중 족장>, 고스비<미디안 여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데마
그런데 이 순간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창으로 그 이스라엘 사람과 미디안 여인을 찔러 죽였습니다. 모세가 비느하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느하스가 그 사람들을 찔러 죽이기로 제비뽑기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회중 속에서 비느하스 만이 똑바로 본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침투하여 신앙의 순결을 파괴하려는 죄악의 씨앗을 두고 볼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여호와의 사랑이 그의 가슴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불의를 미워하며 진리를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지도자들과 심지어는 모세 조차도 넘어 가기 쉬웠던 부분을 비느하스는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쳤고,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에 이르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민25:8-9). 아마 백성의 죄악 때문에 그 땅에 염병이 있어왔고, 백성이 상당히 고통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과, '죄'를 심히 혐오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자기를 저주하다시피 미워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와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죄 때문에(현실 때문에) 낙망하고 슬퍼하는 것, 포기해버리는 것, 누군가가 나서서 해주겠지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곧 바로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죄' 라는 것을 극도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성경의 기록은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민25:1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불의를 미워하는 격렬함>도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세속화 되는 거룩한 분노와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창 18:18~19) 비느하스의 행동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을 통하여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아야 합니다. (민 25:11절)에 있는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라는 부분입니다.
‘질투’(카나, 키느아)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열심, 열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왕하 10:16, 19:31, 사 26:11). 이 단어는 여호와를 향한‘열심이 특심’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비느하스의 행위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비느하스의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 중에 특별히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거룩한 이스라엘 진중에 죄악이 틈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를 돌이키고 진멸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느하스를 통해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느하스에게 일마다 하나님이 직접 비느하스에게 지시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비느하스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었던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과 글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평화의 언약의 체결자 비느하스(12~13)
‘평화’‘솰롬’은‘완전하다’‘건전하다’라난 의미를 가진 동사 ‘솰렘’에서 나왔습니다.
이 어근은 ‘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왕상 4;24)에,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충만’ ‘완전’ ‘조화’ ‘온전한 상태’ 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비느하스와 그 후손들이 대대로 대제사장이 되며, 제사장이 될 것을 보장하는 언약입니다. 당연히 아론의 손자이며, 또한 대제사장을 계승할 엘르아살을 이어 자동적으로 될 것이지만, 그 대제사장직을 아무 분쟁없이 이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시 106:30~31)
결론 : 하나님은 이 비느하스의 사건을 통하여 당신께서 얼마나 교회의 순결을 지키시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훗날에 이 비느하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영광의 눈을 촉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시편에서 시인은 감격스럽게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106편30절).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백성을 패망케 하는 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을 제거하고 뿌리뽑는 데 앞장섰습니다. 모든 죄악의 찌꺼기들을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단호하게 척결하려는 마음은 참으로 거룩한 마음입니다. 오늘도 이 시대의 영적 각성과 부흥을 사모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바로 이런 비느하스와 같이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충만한 정서에 휩싸인 불꽃같은 용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예리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줄 알며 늘 그분의 기뻐하시는 것들과 그 분의 이름과 영광에 인생이 온전히 집착되어져 있는 자! 바로 그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가득한 복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