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5)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지 9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느덧 많은 세월이 지나서 인지 이제는 3.1절을 증언해 줄만한 당대의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3.1운동은 농민운동이나 학생운동이 아니라 기독교가 중심이 된 애국애족운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실상 자기 민족과 나라를 자기 생명이상으로 사랑했던 애국자들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난지 98주년이 되는 오늘 사도바울의 민족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믿음의 선각자인 애국지사들의 민족 사랑, 그리고 민족 사랑의 결정체으로 나타난 3.1운동의 정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민족을 향한 바울의 큰 근심(1~2)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를 만난 후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얻어진 영광과 기쁨, 감격이 얼마나 큰지 (롬 8:35절)“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뿐입니까? (롬 8:38~39)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처럼 복음의 승리와 구원의 감격을 이야기한 사도바울은 동시에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이 근심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 커지는 근심이요, 이 고통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고통입니다.
- 이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은 “차리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내 민족이 내 조국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질지라도’입니다. 설령 내 영혼이 천길만길 지옥 불구덩이로 떨어질지라도 조국이,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핍박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됨을 자랑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애국애족입니다. 사랑은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대한국인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 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국이요 애족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민족을 향한 교회의 큰 근심(1~2)
사도바울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전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 나라 건설함으로 그 의미를 승화시켰습니다. 애국심, 그것이 선교적 열심히 바뀐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개화기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선각자, 애국지사들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 국권과 국가를 잃어버리고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절에 슬픈 조국 대한민국을 끌어안고 함께 울며, 조국과 함께 운명 공동체로 근심과 고통 속에 보낸 곳이 한국교회와 신앙의 선각자들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나라와 독립은 인민에게 있으며 보호를 청하려면 하나님만 있을 뿐이라고”호소합니다. 나라와 백성의 상실, 이것은 교회의 비애와 시련이었습니다. 그만큼 나라와 교회는 한 몸처럼 밀착되어 분간이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한일합방의 비극을 가장 처절하게 체험하고 가장 아파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애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기쁨인 예수를 아는 순간, 이 민족의 아픔이 가슴을 찌른 것입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큰 근심’때문에,‘그치지 않는 고통’때문에 평안하게 발뻗고 잘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산마다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하며, 골짜기 마다 성도들의 눈물로 채워졌습니다. 마치 식어가는 아기의 몸을 부여안고 울부짖는 어미같이, 교회는 민족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앞에 부르짖은 것입니다. 오늘 이런 모습이 다 사라졌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애국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1700만명)의 기독교인은 22만 명입니다. 전체 인구의 1.5>#/span###입니다. 그러나 1.5>#/span###가 조선(한국)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뿌리에서 샘솟는 민족의식은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3.1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3.1운동의 기폭제는 1919년 일본 동경의 한국인 YMCA에서‘2.8독립선언’에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도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3.1운동의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과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3월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 2만명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의 의사를 대내외에 천명했습니다. 비밀리 만든 태극기는 휘날렸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서울 전역으로 메아리 쳤고, 고종의 장례일을 앞두고 서울에 모여든 군중은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의 행진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독립운동은 서울뿐만 아니고 평양, 진남포, 안주와 의주, 선천, 정주 등 곳곳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군중의 만세 소리가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시위에 가담한 이들은 농민, 학생, 지식인, 상공업자,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거의 모든 직업의 사람이 다 참여했습니다.
실제로 한 지도에는 각 지역의 교회를 그려놓고, 다른 한 지도에는 3.1운동의 발발장소와 규모를 그려놓는다면, 그 두 지도다 그대로 겹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국적인 그리고 전 민족적인 애국운동이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3.1운동으로 가장 핍박을 받은 곳은 교회였습니다. 이는 교회가 이 운동의 영감과 동력을 부여하는 배후 세력으로 간주되엇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겪은 가장 비인도적인 참화는 화성의 제암리교회당의 사건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난지 한 달이 지난 4월 15일 낮 12시에 일본 헌병 중위가 제암골에 나타나 교인들을 그곳 감리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군인들은 총을 겨누면서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교회당에 불을 질럿던 것입니다. 그 안에 30여명의 교인들이 다 타죽고 교회당은 잿더미가 된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이 교회를 얼마나 미워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기독교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3개월 동안 5만 명 이상이 일경에게 의해 처형당하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결론 : 2017년 한국 교회에 사는 더 이상 핍박과 고난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1919년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회자 중에 민족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1.5>#/span###의 작은 인원이 민족과 사회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교회가 사회에 끌려가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제는 자정능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핍박과 고난은 없는 대신에 이제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부패하고, 물질 만능주의로 오염된 교회를 가리켜 비난이 난무합니다. 민족에게 존귀함을 받을 교회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큰 근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바울에게 가졌던 민족을 향한 “큰 근심”“그치지 않는 고통”“내가 저주를 받을 지라도 민족을 구하고자하는 열정”우리에게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 교회가 답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주간을 통해서 3.1운동의 정신을 다시 되새기면서 민족 사랑, 국가 사랑의 정신을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애국자는 참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동족을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며 작은 것에서부터 힘을 다하는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